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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09
<조선시대 때 과거시험 문제들>
(세종 때 과거시험 문제)
"땅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염치를 기르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노비제도는 어느 대에 시작하였는가?
노비 또한 하늘이 내린 백성인데 그처럼 대대로 천한 일을 해서 되겠는가?
어느 집안은 노비가 많은 경우 수천, 수백인데 한계를 둘 수 없는가?
예전에는 문반과 무반의 관직이 있으면 관직에 따른 토지가 있었다.
지금은 과전에서 시관과 산관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어떤 법을 취한 것인가?
대저 임금의 순수(순행)를 순임금은 5년마다 주나라는 12년마다 하였는데 지금은 5~6일 사냥하는 행차가 있어도 폐해가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었인가?
도읍을 두개 건설 하는 것은 어떤 뜻이 있는가?
의창은 장차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잇달아 가뭄이 들때마다 백성이 굶주림을 근심하는데 의창의 곡식으로 아직 능히 구휼 못하니 그 까닭은 어째서인가?"
(세종 때 또 다른 과거시험 문제)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를 줄이고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예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임주;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그대 대부들은 사책(史策)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중종 때 과거시험 문제)
"술이 화(禍)가 된 지는 오래이다. 그 근원은 언제부터인가? 우왕이 맛있는 술을 미워했고, 무왕이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고, 위 무공이 술 때문에 저지른 허물을 후회하여 시를 지었다. 술의 화에 대해 크게 염려했으면서도 모두 그 근원을 끊지 못했으니 어째서인가? 후대 임금 중에서도 술 때문에 망한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하나 열거하여 말할 수 있는가? 우리 조정의 여러 훌륭하신 임금께서도 서로 계승하여 술을 경계하셨다. 세종대왕께서 글을 지어 조정과 민간에 유시하신 것은 세 성인의 견해와 다름이 없다. 그런데도 아랫사람들이 음주를 숭상하는 것이 오늘날 더욱 심해져 어떤 자는 술에 빠져 일을 폐하고, 어떤 자는 정신이 혼미해져 덕(德)을 무너뜨린다. 흉년을 당하여 금주령을 내려 막아도 민간에서는 술 빚는 것이 끊어지지 않아 곡식이 거의 없어질 지경이다. 이를 구제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광해군 때 과거시험 문제)
"군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인데, 군사를 더 이상 충원할 수가 없다. 식량은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인데,
양식을 수송하는 길은 모두 훼손되고 없어졌다. 기본적인 생산수단이 붕괴되자, 민심마저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정부가 혜택을 강구하지 못하니,
도적들이 마구 일어나고 있다.
또 기강이 해이해져서 일꾼들이 일터를 모두 잃어버렸고, 행정 명령이 문란하고 현실에 어긋나 정치에 필요한 법령과 예악이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조세의 종목도 너무 많아, 가혹한 세금징수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고을이 점차 황폐해지는데도, 부역은 점점 가중되고 있다.
기계와 장비는 무뎌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고, 군사적인 대비는 너무나 소홀하다. 아무리 성을 쌓고 못을 깊이 파놓아도,
죽음을 각오하고 지킬 사람이 없다. 게다가 남방의 바닷가는 텅 비어 주민이 없고, 해적만 끊임없이 틈을 엿보고 있다.
북쪽 변경의 여러 진은 텅 빈 장부만 붙들고 있고, 오랑캐는 날마다 노략질을 하고 있다.
이런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생각을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다.
잘 다스리고자 하는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추진하기만 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갖가지 행정체계는 갖추어져 있지만, 실효가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나라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어서, 도저히 만회할 수 없기 때문인가? 폐단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상세히 말해보라.
오래 묵은 폐단을 혁신하고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나 한의 성대한 시대처럼 만들되,
진이나 송의 말기처럼 비루한 처지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어떤 방법을 따라야 하는가?
실력을 갖추고서 때를 기다리는 그대들은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할 높은 식견과 탁월한 견해를 갖고 있을 테니, 대책에서 모두 펼쳐보라. "
(숙종 때 과거시험 문제)
"울릉도가 멀리 동해에 있는데 강원도에 속해 있다. 수로가 멀고 험해 섬사람들을 데리고 나오면서 현재 비어 있다.
요즘 일본인이 죽도(竹島)라 부르면서 백성들의 어로 활동을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우리 입장을 설명해도 (일본은) 들을 생각이 없다.
혹자는 장수를 보내 점거해 지키자고 하고, 혹자는 혼란을 만들지 말고 일본인의 왕래를 허용하자고 하는데,
변방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킬 방도를 강구해 자세히 나타내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