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춧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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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춧가루

익_0oi8k3 3.2k 21.03.13
고춧가루


한국인은 매운 고추를 즐겨 먹는데, 고추가루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식품이다. 고추가루는 우선 김장을 담그고 고추장을 하는 주요 재료다.


  나는 고추가루를 밥먹 듯하는 사람이여서 안해는 해마다 고추가루 장만에 여간 신경을 쓰지 않는다.


  햇고추가루 맛이란 사람을 감질나게 만든다. 나는 안해가 어서 햇고추가루를 장만하기를 은근히 기다린다. 묵은 고추가루가 항상 비축이 되여 있긴 하지만 햇고추가루와는 비교도 안된다. 신선하지 못하거니와 특유의 향기도 없고 매움도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추철이 되면 장마당에는 고추장사가 절반 장터를 차지하고 판을 치는데 아낙네들은 포대채로 사들이기도 한다. 또 여기저기서 고추를 다듬고 썰고 뒤적이며 종일 바삐도는 아낙네들을 볼 수 있다. 할머니들도 있고 젊은 각시들도 있다. 일손을 돕는 령감들, 남정네들도 적지 않다. 이 고추철은 시간이 긴박하고 절주가 빠르다.


  통고추대로 말리는것은 전통적 방법인데 그때는 집집마다 고추다래가 주룽주룽해서 가을맛이 물씬 나고 보기도 좋았다. 그렇게 바싹 말린 고추를 하나하나씩 마른 헝겊으로 깨끗히 닦은 후 가루를 내였다. 고추절구, 고추방아를 찧을 때면 녀인들은 코구멍을 막고 입에는 수건을 감고도 눈물, 재채기, 기침을 련속 퍼부었다.


  지금은 발전하고 약아져서 통고추를 썰어 말린다. 그리고 기계로 번뜩 가루낸다. 이 수단은 녀인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진보다. 보통 고추가루 한근에 50전의 가공비를 받지만 약삭빠른 수공업자는 1원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얼마나 거뿐한지 모른다.


  금년 고추철이 되자 안해는 장마당에 나가 빨간 고추를 세 마대나 사왔다. 그것을 보고 고추를 잘먹는 나도 아름이 차서 입이 딱 벌어졌다. 저것을 어찌 다 다루겠는가?! 우선 닦고 썰어야 하고 또 바싹 말려야겠는데… 물퉁박이 고추는 적어도 나흘은 말려야 한다. 하늘이 잘해줘서 해가 바짝 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좋은 날씨여야 3~4일 역사질해 기계로 번뜩 고추가루를 낼수 있다. 하지만 요즘 날씨는 어찌도 변덕스러운지…

  나는 그 잔손질이 싫어서 농촌 고추가루를 사먹자고 우겼다. 그런데 안해는 그렇게 만든 고추가루는 질이 나쁘다느니, 맛이 없다느니, 김장을 망칠 수 있다느니… 가지가지 리유를 내놓았다. 그러면서 나를 삐치지 말라고 했다. 놀음 삼아 혼자 살랑살랑 한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그게 어디 놀음 삼아 살랑살랑 할 수 있는 일인가?!

  고추 세 마대를 장터에서 집까지 날라온 것만 해도 내가 낯이 깍기는 일이였다. 106근이나 된다는데 그걸 운임이 아까워서 삼륜차를 쓰지 않고 손수레로 실어왔다니 남정네가 없는 과부로 보지 않겠는가…


  하여튼 고역이 시작되였다.

  무슨 일이나 후닥닥 해치워야 시름 놓는 성미인 나는 썰어 말리우자고 했고 안해는 그러는게 아니라고 했다. 싱갱이를 벌여도 쓸모 없다. 이런 일은 안해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

  보아하니 날씨가 신통치 않기에 우선은 통고추를 널어 말리우다가 날씨가 좋을 때에 재빨리 손 쓴다는 게 안해의 전략이였다. 날씨가 궂으면 통고추대로 둬야지 썰어놓고 있다가 제때에 말리우지 못하면 고추가 썩는다.

  날씨가 언제부터 좋아지겠는지 기회를 기다린다는데, 이거 장기전 지구전을 하게 생겼군. 나는 부담이 하늘만큼 커졌다.


  금년에는 태풍이 벌써 다섯 번나 불어치면서 우리 고장에도 영향이 많았다.

  고추철 요맘때면 파란 하늘에 해가 지지듯 불타다가도 갑자기 먹장구름이 뭉쳐돌고 비를 뿌리다가는 금방 멀쩡해 지는가 하면 또 갑자기 미친 바람이 불어치기도 했다.

  하늘이 심술을 부리면 아낙네고 남정네고 급급히 달려다니며 널어놓은 고추를 걷어들여야 했다. 그러다가 또 비죽히 맑은 하늘이 보이면 내다 널어야 하고… 말그대로 무슨 전투를 하는것 같았다. 밤에는 그 숱한 고추를 걷어들여 장판바닥에 널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아침에는 또 밖으로 내여 가는데 자리다툼도 긴장하다.

  이틀인가 지나서 안해는 이젠 고추를 썰어야겠다고 했다. 관건은 날씬데 오늘부터 며칠은 날씨가 좋다고 일기예보에서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벽 2시에 일어나 100여 근의 고추를 썰기 시작해 11시에 다 썰고 마당에 널기까지 했다. 배구장 절반만큼은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제발 변덕이 없기를 빌었다.


  그런데 이거 웬일이냐?! 신신펀펀 좋던 하늘 중천에 갑자기 검은 구름 한 덩이가 뜨더니 멀쩡하던 하늘이 대뜸 찌부둥해졌다. 나는 기상대를 죽일놈 살릴놈 줄욕을 퍼부으며 급급히 고추를 집으로 끌어들였다. 전기장판을 켜고 선풍기를 틀고… 고추말리기 대회전이 집안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련속 사흘 역사를 해서 고추를 살려냈다. 그런데 정작 가루를 내고 보니 거칠고 주근주근해서 다시 전기장판을 켜고 선풍기를 돌리는 동작을 거듭해야 했다. 이틀이 지나니 고추가루가 다 말라서 다시 가루를 냈는데 고운 고추가루를 십여 근 얻을 수 있었다. 안해는 고추가 좋아서 상등 고추가루를 얻었다며 무등 좋아했다. 저녁에 한술 듬뿍 떠서 돼지다리곰국에 넣어 먹어보니 맛이 일품이였다.


  그런데 2~3일이 지나 안해가 또 고추 세 포대를 사왔다. 이런 기막힌 일이라구야! 내가 벌컥 역정을 내니 안해는 또 그 말, 삐치지 말란다. 요건 자기가 알뜰살뜰 다루어서 자식들에게(세 집)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발상은 좋지만 내가 가만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에는 일기가 너무 좋았다. 아마 하늘도 어미심정을 알아준 것 같았다. 그래서 또 좋은 고추가루를 10여 근 얻었다.


  이로서 금년의 고추가루 역사질이 결속되였다. 두 번 째로 고추가루를 내여온 날 저녁 안해는 불고기로 총결연회를 베풀었는데 내가 수고 많이 했고, 공이 크다며 표양했다. 나는 큼직한 불고기 한 점을 햇고추가루에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별미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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